10월 31일, 500년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아시는 분 계세요? 마르틴 루터가 교황청의 작태를 겨냥한 95개조항의 반박문, 지금 말로 하면 시국 선언문을 자신이 설교하는 교회이자 가르치고 있는 성경 대학인 성채 교회 정문에 붙인 날입니다. 그날 루터는 이것이 종교 개혁의 출발점이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는 역사가들은 그날 루터의 행동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둠 속에서 교회 탑으로 연결된 층계를 오르던 루터가 휘청거리며 얼결에 종탑의 끈을 잡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울린 종소리가 온동네 사람들을 깨워놓고 말았다.
마치 루터의 출현이 우연인 것처럼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당시 교황청과 교회 리더들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던 하나님 자녀들을 영적으로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준비해오신 도구가 바로 루터였음을 알게 됩니다.
당시 로마 카롤릭은 연옥이라는 개념을 이용해 부를 갈취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신앙 생활을 하다가 죽은 자들은 바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연옥이라는 곳에서 정화의 과정을 먼저 겪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연옥에 머무는 시간을 줄여준다는 명목으로 성도들로부터 돈을 갈취한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성경에 등장하는 성물들을 수집해서 교황청과 짜고 그 가치를 부가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우리 교회에는 예수님이 지신 바로 그 십자가의 나무 조각을 갖고 있다. 이 조각을 만지면 연옥에서 있어야 하는 시간이 1000년이 줄어든다. 이렇게 선전하고 그 수상한 성물을 만져보려고 오는 성도들에게서 돈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십자가 조각이 진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저도 터키를 방문했을 때 한 성당에서 그런 목적으로 수집된 물건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윗의 검, 아브라함이 사용한 식기, 요셉이 둘렀다는 터번, 불타는 떨기나무의 한 가지…다 수상한 것들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을 빙자해서 불쌍한 성도들로부터 돈을 뜯어낸 겁니다.
더 엽기적인 방법은 면죄부를 파는 것이었습니다. 정해진 돈을 내고 교황의 인장이 찍힌 면죄부를 사면 연옥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고 천국으로 바로 들어간다고 속인 겁니다.
이렇게 해서 쓸어모은 돈은 일부는 교황과 리더들의 사치 행각에 그리고 일부는 성당을 보수하고 신축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횡포 속에서, 성도들은 복음에서 점점 멀어져갔고, 교회는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이용당하고 착취 당하는 성도들만 불쌍한 겁니다.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위한 구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관이 되었을 루터를, 1505년 엄청난 낙뢰 사건을 겪게 하심으로 신부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또한 죄와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고민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당시 교회에서 고안해낸 대표적인 죄 해결법을 철저하게 실천해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실천해본 것은 금욕주의적 생활이었습니다. 철저하게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했고, 그 길에서 벗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찾아오면 자신의 몸을 사정없이 학대해서 의의 길에 서려고 노력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통해 깨달은 것은 인간의 죄성이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 겁니다.
두 번 째는 고해성사였습니다. 루터는 모든 죄를 철저하게 씻어내기 위해 아주 사소한 잘못까지도 고백했습니다. 한 번은 6시간 동안 고해성사한 적도 있을 정도 입니다. 그래서 루터만 보면 동료들이 피해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도 죄의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고해성사로는 일상의 죄는 씻어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죄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겁니다.
다음은 자신의 스승 슈타우피츠가 가르쳐준 신비주의였습니다. 자기 뜻과 주장을 다 내려놓고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임재 안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루터가 죄를 씻어내려고 몸부림치는 것도 루터의 주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마져 내려놓고 그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자신이 존재하도록 노력하라는 겁니다. 촛불이 햇빛 안에 녹아들듯이, 강물이 바다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듯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겁니다. 마치 불교식 접근처럼 느껴지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루터의 고민을 잠시 덜어주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죄의 문제를 철저하게 다루시는 공의도 있음을 루터는 너무나 잘 알았던 겁니다.
제자의 고민이 더 깊어져 가는 것을 본, 스승 슈타우피츠는 자신이 가르치던 성경 교수의 자리를 내어 줍니다. 말씀 안에서 답을 찾아보라는 뜻이었습니다. 1513년부터 1517년까지 루터는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이때 루터는 답을 찾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절대 의롭게 될 수 없고, 그 사실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완전히 씻어주셨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하신 십자가 사건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거저 얻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그때부터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선포하는 자가 되었고, 종교 개혁의 발화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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