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솔길 의자에서

뭉클한 이야기 50

채우미 2025. 5. 1. 09:14

 

 

 

John Perkins 박사는 어릴 끔찍한 체험을 했습니다. 1930 미시시피 주의 African American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자신의 형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목격했던 겁니다. 길로 퍼킨스는 캘리포니아로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살아가던 주님을 만난 퍼킨스는 고향에서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촌 지역 African American들에 대한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어릴 끔찍한 경험으로 마음 깊이 자리잡은 두려움과 주님 주신 소명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결단하고 1960 미시시피로 거주지를 옮깁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Voice of Calvary Ministry라는 선교단체를 구성해서 흑인인권운동을 펼칩니다. 단체의 사역이 안정적으로 자리잡자, 퍼킨스 박사는 1982 다시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갑니다. 평범한 목회를 꿈꾸고 이주한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퍼킨스 박사가 도착하자마자 지인이 그의 손을 이끌고 블러드 코너(피의 교차로)라고 불리우는 지역을 방문합니다. 파사데나 북서쪽에 위치한 지역은 마약과 매춘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곳으로 낮시간 동안 일어나는 범죄율로는 미국 최고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퍼킨스 박사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벌겠다고 마약거래상의 연락책 노릇을 하다가 소중한 생명을 잃고마는 수많은 생명들이 눈에 들어온 겁니다.

 

집에 돌아온 퍼킨스 박사는 부인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평범한 목회를 하며 지역을 위해 기도할 것이냐, 직접 그곳으로 뛰어들어 불쌍한 주민들과 함께 것이냐?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기도 끝에 퍼킨스 박사는 주님이 원하신다면 그곳으로 들어가겠습니다.”라고 결정했습니다.

 

지역으로 이주한 퍼킨스 박사는 자신의 사역 이름을 하람비 미니스트리라고 불렀습니다. 하람비라는 말은 아프리카 케냐 말로 ‘All Pull Together” 모두가 함께 이끌어가자라는 뜻입니다. 주중에는 방과후에 아이들을 데려다가 풍성한 음식을 제공하고, 공부를 가르쳐주고, 함께 놀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처음 일년 동안 사역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오질 않았습니다. 마약거래상들이 손에 쥐어주는 돈이 달콤했던 겁니다. 그리고 안전 문제도 무시할 없었습니다. 자기 지역에 침투해온 이방인을 못마땅하게 여긴 마약상들과 포주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총을 쏘아대고 집의 문을 부수어대는 겁니다. 그러니 겁에 질린 주민들이 자기 아이들을 보내길 꺼려했던 겁니다.

 

그러나 일년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포기할 모르는 퍼킨스와 동료들의 사역 앞에서 마약상들과 포주들이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한 겁니다. 지금은 가장 마약거래가 심하던 집이 하람비 미니스트리의 본부로 바뀌었고, 범죄율도 거의 0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람비 본부는 주중에는 공부를 배우는 학생들로, 주말에는 예배를 드리러 오는 주민들로 북적거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 이름을 위해서 자신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헌신한 믿음의 성도가 세상을 바꾸어 놓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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