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2: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편 22편은 정말 신비한 시편입니다. 다윗이 지은 시라, 예수님께 이 땅에 오시기 약 1000년쯤 전에 지어진 시편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수난 당하시는 장면을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절규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신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에는 물같이 쏟아졌고 모든 뼈가 어그러졌다는 표현이, 15절에는 고통으로 혀가 잇틀에 붙었다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16절에는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다는 말씀도 등장합니다.
18절에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는다는 말씀도 나옵니다.
성경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찰스 제넨스는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미리 예언하고 있는 그 많은 절들 중에서, 7절과 8절의 말씀만 선택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이유를 깊이 묵상해보았습니다. 묵상하면서, 찰스가 왜 성경 말씀을 collect해서 메시아를 쓰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찰스 스스로 밝힌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되는 것이고, 다음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올바로 믿고 건강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가지고 묵상하는 중, 두 가지 큰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들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찰스는 예수님이 겪고 있는 고통 중, Inner Pain, 즉 마음으로 겪고 있는 고통에 더 focus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절들은 육체적인 고통을 다루고 있는데, 찰스는 예수님께서 가장 아파하는 부분은 마음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본문 7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처지를 비웃고,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님의 존재, 삶을 부정하는 자들은 유대교 리더들과 그 리더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끝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전하신 천국 복음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영광 받기 위해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벽 예배 첫째날 이사야 40:1-5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래전 이미 세워두신 위로 프로젝트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선 그 프로젝트를 완성할 자가 누구인지도 이 말씀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메시아,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어서 그 위로 프로젝트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오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위로 프로젝트를 만드신 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 인간을 위해서 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만드신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위로 프로젝트를 통해 구원받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시라는 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쉼 없이 이곳 저곳을 다니셨고, 그곳에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을 행하신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약에서 택함 받은 유대인들이 먼저 이 소식을 듣고 구원받길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둘 씩 묶어 전도를 보내실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라고 당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끝내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실 일을 까맣게 알지 못한 체, 예수님을 비웃고, 예수님을 향해 입술을 내밀고 머리를 흔들고 있는 겁니다. 주님은 택하신 백성들로부터 비웃음 당하고 거부 당해서 마음이 아프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님이 이루실 구원을 깨닫지 못하고, 그 결과 끝내 구원 받지 못할까 봐 그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신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용서해주세요.” 저희들을 향해 구원의 문을 닫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께는 못에 찔린 손과 발 때문에 겪는 고통 보다,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보는 고통이 훨씬 더 크셨던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찰스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예수님처럼 아파하는가?’ 우리 두란노 식구들에게는 이 아픔이 있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맡겨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평생 쉬지 않고 감당하는 참제자들이 다 되길 축원합니다.
또한 찰스는 이 말씀을 통해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거부하고 조롱한 건 자기들이 믿고 있는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인간의 견해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아니라 의견인 겁니다. 그런데 그 비 진리를 가지고,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거부한 겁니다. 예수님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부분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장로들은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자기들의 지혜로 정했고, 오랫동안 그 규칙을 지켜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이 만든 이 규칙이 절대 지켜야 하는 진리의 자리에 올라가고 만 겁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은 나다 하셨을 때 콧방귀를 꼈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시며 안식일에 병든 자들을 고쳐 주시자, 자기들이 지키는 전통을 어겼다고 분노해서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운 겁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고 조롱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게 된 건, 진리를 버리고 인간의 생각을 따랐기 때문인 겁니다.
찰스는 본문 말씀을 통해, 이단 디이즘의 위험성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이단에 빠지면,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해서 살아가던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까지 지신 예수님의 그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부정하고 조롱하는 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핵심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시는 교회가 세상의 조롱 당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대로 살지 않을 때, 그런 비참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는 예수님께선 마지막 기도에서 이렇게 간구하셨습니다. “제가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니, 제자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만들어주세요.”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는 자들로 세워 주셔서,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겁니다. 제자들을 위한 첫번째 기도였습니다.
우리 두란노 식구들은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삶이 되길 원합니다. 말씀을 대할 때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시고 꾸짖으시고 바르게 하시고 의로 인도하시는 손길을 체험하고 그 결과 삶이 변화되어 온전한 주님의 제자가 다 되길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항상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거룩한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