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한 두 강도를 보면서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강도 둘도 함께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두 강도가 주님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한 강도는 주님을 비방했습니다. 메시아라면서 스스로와 자기들을 죽음에서 구하지 못하는 무력함을 비난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분명 이들을 강도, 행악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지은 죄 때문에 십자가 형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 강도는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죽음도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이 살려주신다고 해도, 이 강도는 지은 죄 때문에 다시 십자가 형틀에 못 박힐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알 겁니다. 그런데도 강도는 그저 죽음 앞에서 아무 소용도 없는 마지막 발악만 하고 있는 겁니다.
이 강도의 모습은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대변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해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그 죄 때문에 사망에 이른다는 진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데, 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아예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엉뚱한 길에서 헤매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죄와 사망의 관계를 분명하게 전하고, 죄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고 사망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이 진리를 바르게 전해야 하는 겁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이 진지하지 않거나 심하게 거부해도, 우리는 영혼의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하고 온유하게 진리인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과 10장의 말씀 대로, 우리가 전한 복음을 통해 이미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두란노 식구 모두가 하나님께서 잃은 영혼을 구하시는데 사용되는 아름다운 도구가 되길 축원합니다.
다른 강도는 자기 죄를 대하는 태도와 주님을 향한 마음이 전혀 달랐습니다. 자기들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고, 지금 그 죄에 합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에서 회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기들과 다르게, 옳은 일만 행하셔서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계신 것이라고 주님을 변호합니다. 주님께서 옳은 일만 하셨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아, 강도 짓을 하고 잡히기 전,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던 말씀을 직접 들은 적이 있거나, 귀신 들린 자 또는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장면을 직접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예수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후 어디에 있든지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얻은 정보들을 마음에 소중히 담아온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42절 말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말씀이 이 강도의 주님을 향한 믿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는 순간 하나님 나라에 임하실 거라고 믿음으로 고백한 겁니다. 강도의 믿음은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들어가실 하나님의 나라를 당신의 나라로 고백함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믿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구원의 권세를 갖고 계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에 임하실 때 자기를 REMEMBER 기억해달라고 기도한 겁니다. 주님께선 강도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함으로, 강도는 인생의 가장 끝자락에서 그것도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기 바로 직전에 구원받은 어마어마하게 복된 자가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잃은 영혼을 부르는 시간은 다양합니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는 성도도 있고, 본문의 강도처럼 죽기 바로 직전에 구원받는 성도도 있는 겁니다. 장소도 다양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러 가다가 구원 받았고, 본문의 강도는 십자가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 사역에서 우리가 감당할 일은 없는 걸까요? 있습니다. 본문의 복된 강도처럼 예수님 믿고 천국과 영생을 소유한 백성 답게, 기쁨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발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시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면서 자기와 아볼로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변의 잃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말씀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전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듣겠느냐고 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발이 되고, 하나님께선 우리가 전한 복음을 통해 역사하셔서 예수님 믿고 구원 받게 하시고…이렇게 하나님과 우리의 멋진 동역을 통해 한 영혼 한 영혼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감격적인 장면을 보고 기쁨으로 찬송하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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