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red Douglas Shepard는 청년의 때에 선교의 소명을 받고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의대에 들어가 공부를 마치고 의사가 되자 마자, 27살이 되던 1882년, 갓결혼한 아내와 함께 오스만 투르크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그는 의과 대학에서 가르치며 환자들을 돌보았고, 또한 자신이 필요한 곳이면 몸을 아끼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특히 오스만 투르크 정부가 아르메니안 족에 대해 대학살과 추방을 자행한 1895년과 1909년에는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모아 놓은 camp로 달려가서 몸을 사리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1895년 아빠와 함께 camp로 갔던 딸 Alice는 그때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놓았습니다.
“Camp는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21,000명 정도 되는 생존자들은 허기와 공포에 짓눌려 있었고, 위생 상태가 엉망인 Camp는 콜레라가 창궐해 있었다. 전염병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도 상당 수 있었지만, 생존자들은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뿐, 그 시신을 끌어내 묻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마치 모두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는 camp 곳곳을 다니며, 숨만 쉬고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고, 시신을 격리하게 했으며, 치료하기 시작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그러나 질서 있게 움직이는 아빠는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성령 충만한 모습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빠의 헌신으로 하루에 50명씩 죽어 나가던 camp는 일주일만에 하루 사망자가 5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Shepard는 그들을 치료하는 동시에, 미국 선교 단체와 적십자사에 구호를 요청했으며, 오스만 투르크 정부를 향해선 아르메니아안에 대한 학살을 멈추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의 헌신은 환자를 치료하다가 콜레라에 전염되어 하나님 품에 안긴 191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의료 선교 사역을 인정받아 적십자상을 받았을 때, shepard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목적입니다. 돈이나 명예를 위해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이 분명한 진리를 증거하러 온 겁니다. 나의 헌신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면, 난 이미 상급을 다 받았고, 그렇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Shepard의 장례 예배에 참석한 한 아르메니아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실제로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닥터 세파드를 통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선 이 아르메니아인의 고백을 통해 당신 품에 안긴 Shepard에게 너 날 위해 참 잘 살았다고 칭찬해주신 겁니다.
교회가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위기의 시대, 우리들은 강한 전염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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