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숲

LP 수집 중 수집한 이야기

채우미 2014. 11. 12. 03:43


한 두 주쯤 전 일입니다(이 사건을 꼭 기록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기록으로 남기게 됩니다 :)). 던디 상에 있는 숲길을 산책한 후 그곳에서 2분 정도 떨어진 쇼핑몰에 위치한 구세군이 운영하는 쓰리프트 샵으로 달려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쓰다가 도네이션 한 물건들을 진열해두고 팔아 그 수익금으로 불우 이웃을 돕는 가게 입니다. 혹시 매물로 새로나온 LP가 없을까 해서였습니다. 오다가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들르는데 갈 때마다 상태가 괜찮은 LP 몇 개씩은 건져옵니다(다음엔 가게 내부도 한 번 찍어볼까 합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와보니 밖엔 이미 땅거미가 내려 앉았습니다. 5시 30분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는데...'만추'라는 단어가 퍼뜩 스쳐갔습니다. 가게로 향하는데내가 즐겨가는 LP 코너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보, 혹시 저 분 우리가 아는 분 아닌가?" 아내가 자세히 보더니 맞다고 합니다. 부동산업에 종사하는 분이셨습니다. 주재원 시절                                                                                     

갑자기 N.J.로 발령받아 집 처분이 어려웠을 때 도움 받은 적 있는 분이었습니다.  의외의 장소에서 반가운 분을 만나니 기분이 좋더라구요.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LP 코너에서.


급히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했습니다. 그분도 깜짝 놀라시더군요. 함께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물었습니다. "여긴 왠 일이세요. 저처럼 LP를 사러 오셨나요?" 예상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옆 채소 가게에 왔다가 잠간 들렀어요. 집을 정리하는 분들이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을 처분하고 싶어들 하시는데...그럴 때 이런 곳에 기부하도록 조언할까해서요. 그래서 기부 방법도 알아보고, 세금 혜택이 있는지도 알아보려구요. 그러다가 LP 코너가 있어서 잠간 서서 구경하고 있는 거예요. LP가 오래된 물건들이라 커버의 그림들, 곡 제목들이 옛날을 기억하게 해주네요. 그래서 몇 장 사다가 커버를 액자에 넣어 집에 걸어둘까 생각 중이었어요...집에 턴테이블이 없어서 LP를 듣진 못해요. 그렇게 음악에 관심있는 것도 아니고요."

  

대답을 듣는 동안 가슴이 따스해짐을 느꼈습니다. 시간 속에 두고 온 먼 옛날의 추억들이 갑자기 파노라마처럼 밀려왔기 때문일 겁니다. 60-70년대에 만들어진 LP가 이런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놀라기도 했구요. LP 코너에 서서 상태좋은 LP를 고르는 동안, 각 LP를 통해 기억해내는 그분의 구수한 추억담을 들을수 있었습니다. 의외의 장소에서 뜻밖의 지인을 만나 옛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참 즐거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LP가 담고 있는 음악을 다 쏟아낸 후 턴테이블의 바늘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듯 그분의 추억담이 끝났을 때, 그분과 아내와 전 계산대로 향했습니다. 갑자기 그분이 제 손에 든 LP들을 빼앗았습니다. "이렇게 만나서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이 LP 값은 제가 내고 싶어요." 크게 부담가지 않는 가격(장당 1불)이기도 하고  해서, 그분의 성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뜻밖의 호의는 또 다른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때 사온 LP들 입니다. 특히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은 비닐도 뜯지 않은 새 것이라참 기뻤습니다(거의 이런 경우가 없거든요.).   


그분과 헤어져 돌아와 집에 도착한 후 LP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이런 일들입니다.


1. 알콜을 섞은 증류수로 LP의 겉면을 잘 닦아냅니다. 소리골에 켜켜이 쌓인 세월 

    의 때를 제거하는 작업입니다.

2. 잘 씻은 판들을 30 분 정도 말립니다.

3. 마를 동안 LP를 넣는 비닐을 새 것으로 교체하고 낡은 Cover 위에 보호용 비닐

    을 덮어 씌웁니다.

4. 마르고 나면 하나씩 턴테이블에 걸어 브러시로 LP 면에 남아있는 먼지를 제거

    한 후, 음악을 들어봅니다.

   

5. 그런 후 선반에 꽂아둡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5,6번, 마리아 칼라스의 아리아들 (베에토벤은 새 것 그대로 보관하기로 했습니다), 바바라 스트라이젠드, 닐 다이아몬드 ...LP가 다 상태가 좋았습니다. 기분 좋더군요.


이번 LP 수집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소리숲'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소리로 채우다  (0) 2015.10.31
어느 평화로운 월요일 아침에...  (0) 2015.01.20
산수이 튜너...고마움  (0) 2014.09.22
30 여년 만에 조우하다  (0) 2014.06.10
2 달러가 준 뜻밖의 기쁨  (0) 2014.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