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커리커처

고난주간 묵상 넷 마가복음 15:22-37, 누가복음 23:33-43

채우미 2019. 4. 21. 12:32



비아 돌로로사의 제11처와 제12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던 장면과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담고 있는 복음서의 말씀들을 묵상하는 중, 생명이 떠나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들의 마음에 소중한 교훈을 심어주고자 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23절을 보면 주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는 일종의 마취제입니다. 먹으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매달려 죽어갈 때까지 겪어야 할 그 끔찍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선 이 심판의 과정에 따르는 모든 고통을 그대로 체험하심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교훈을 남겨주고 계신 겁니다. 죄에 대한 심판과 그에 따르는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마지막 때 있을 최후 심판에서 둘째 사망자가 되면 불못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겪게 된다는 계시록 20장의 말씀을 몸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분명하고 심플합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 받으라는 겁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다 구원받으신 줄 믿습니다. 이젠 아직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서 이 심플하고 분명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34절 말씀을 보니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저희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희란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 법정에 세우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선동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백성들, 그리고 십자가 형을 선고하고 그 형을 집행하는 로마 총독과 병사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 말씀에는 십자가 사건은 혈과 육의 싸움이 낳은 결과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악한 영의 세력이 뒤에 있고, 그 위에는 그 모든 것을 사용해서 구원이라는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모르고 사탄의 도구로 이용된 저희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저들도 구원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우리가 매일 감당해야 하는 싸움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악한 세력과의 영적 전쟁이라는 걸 분명히 알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를 힘들게 하는 형제와 자매들도 기도와 사랑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닮아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참제자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39-4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믿음을 고백한 강도를 구원해주십니다. 구원의 복을 누린 강도는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십자가 형을 받고 있다.”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생각”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당신의 나라라는 표현 속에는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러자 주님께선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천국이 분명히 있다는 것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 천국에 들어가는 길임을 아주 확실하게 보여주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 두란노 식구들은 천국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천국 백성답게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34절을 보니 예수님께서 갑자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외치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상황의 문법에 맞지 않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주님은 하나님을 늘 아빠 또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호칭을 바꾸었다는 것이 수상합니다. 또한 주님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어찌하여 날 버리셨나이까 하는 원망의 표현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말씀을 하신 걸까요? 시편 22편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22편 1절이 이 똑같은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는 겁니다. 22편은 장차 있을 메시야의 고통과 그를 통한 구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시편의 첫절을 외치심으로 지금 그 일이, 인류를 위한 구원의 문을 여는 놀라운 사건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선포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메시야인 날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선포하고 계신 겁니다. 숨을 거두시기 직전까지 복음을 선포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무한한 사랑을 봅니다. 우리도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인류에게 임한 최고의 선물,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참제자로 살아가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