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서는 주님께서 십자가 수난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만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은 만찬 자리에서 드린 기도를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두 개의 큰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됨입니다. 이 주제는 첫째 날 주님의 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나누면서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른 주제, 주님의 제자들이 거룩함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에 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주님은 14절과 16절 말씀을 통해, 주님이 그러신 것처럼, 구원받은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신 후에는 다시 계시던 곳, 천국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다릅니다.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니 이해가 됩니다.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는 중, 예수님께선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태에서 나와서 이 땅의 한 나라에 속한 시민이 되었듯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 재미있는 건, ‘거듭나다’ born again의 again이라는 전치사가 “from above” ‘위로부터, 하늘로부터’라는 뜻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 두 의미를 합해서 번역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나다’의 의미가 더 정확해집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데, 거듭남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는 선물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소속이 완전히 바뀐 믿음의 성도를 바울은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예수님과 하늘에 앉아있는 자들이라고 표현했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거룩한 나라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인 겁니다. 할렐루야! 독생자 아들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하늘 나라에 속하게 하신 하나님께 우리 함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길 바랍니다.
그런데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 구원받은 자들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사실이라는 걸 사도행전의 사건들이 증거합니다. 사도행전의 주요 인물 하나인 바울의 삶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은 전쟁을 방불케 합니다.
1차 선교 여행 중에는 복음을 대적하는 유대교인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합니다. 2차 선교 여행 중에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면서 동시에 돈을 사랑하는 로마인에 고발에 의해 채찍을 맞고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합니다. 3차 선교 여행 때는 우상을 섬기며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대상으로 비즈니스해서 돈을 버는 자들이 모여 바울을 해하려고 집단 행동을 벌입니다. 3차 선교를 다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땐, 유대인들의 거짓 고소 때문에 살해 위협에 시달리며 2년을 감옥 갇혀 지냅니다.
이 모든 환난의 뒤에는 주님께서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부르신 사단과 악한 영의 세력들의 계략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때도 악한 영의 세력들이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수단 전부를 끌어다가 주님을 대적했습니다. 히브리서 4장은 주님께서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셨다고 증거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즉 구원을 완성하고 승천하시자, 사단과 그 세력들은 이제 주님의 제자인 우리들을 표적으로 삼아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과정을 영적 전쟁, 영적 씨름이라고 부릅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18절 말씀을 보니, 그런데도 주님은 제자들을 이 위험한 세상 속으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십자가 사랑, 그 무한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주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 걸까요? 그 답도 18절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이 말씀이 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이 시험과 유혹이 들끓은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아들 예수가 감당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 세상에 보내신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험이 가득한 세상으로 보내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인 겁니다. 그 사명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이 전도의 사명을 분명하게 맡겨 주셨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기도에 담긴 큰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이 소명입니다. 제자들이 이 험한 세상 속에서 복음 전파의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계신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제자들을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십니다. 거룩하다는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세상 속으로 보내시면서, 세상 사람들과 뚜렷하게 눈에 띄도록 구별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계신 겁니다. 전쟁터에서 내가 누군지 금방 알아보면 불리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단의 관점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악한 영의 세력들은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주님 말씀대로 구분된 삶을 사는 것이 힘입니다. 성경의 사례를 볼까요?
하나님께선 40년 광야 생활 후,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해 여호수아를 제 2의 리더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해 항상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전략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두려울 일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실천했습니다. 요단 강을 건넌 후,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은 없는지 생각하고, 할례를 행합니다. 출애굽 후 광야 생활 중 태어난 자녀들에게 할례를 못한 겁니다. 그래서 할례를 명령합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출발한 후 이곳에 오기까지 한 번도 지키지 못한 유월절을 지킵니다. 둘 다 전쟁 중에는 아주 위험한 행동입니다. 할례를 하고 어떻게 싸우겠어요, 유월절을 지키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적이 쳐들어오면 위험한 겁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을 지켰을 때, 하나님께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군대 장관을 보내주셔서 힘과 위로를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들을 전도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을 따라 이 교회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겁니다. 그러자 우려할 일이 생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크리스찬이라고 부르며 손가락질하기 시작한 겁니다. 크리스찬이란 예수쟁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 교회는 더욱 부흥했고, 가장 먼저 로마 전역에 선교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크리스찬이라는 별명을 영광스러운 칭호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구분된 삶을 살아갈 때, 그 말씀을 통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소개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절대 행복과 기쁨 감사를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제자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예수커리커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0) | 2022.04.22 |
---|---|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른다 (0) | 2022.04.19 |
다섯째 날: 참 포도나무와 가지 (0) | 2022.04.15 |
넷째 날: 성령 (요한복음 14장 & 16장) (0) | 2022.04.15 |
셋째 날: 기도 (0) | 2022.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