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클한 이야기 29
1958년 4월 25일 금요일 밤 9시경 펜실베니아 대학 주변 해밀턴 거리 36가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26세이던 한국인 유학생 오인호씨가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보낼 편지를 들고 우체통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근처에 숨어 있던 흑인 불량배 11명이 달려들었습니다. 11명의 불량배들은 오인호씨를 둘러싸고는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날카로운 철사가 달린 블랙잭이라는 무기를 휘두르자 오씨의 머리에서 살점이 뜯겨져 나왔습니다. 콜라 병을 깨뜨려 오씨의 몸을 찔렀습니다. 정신없이 맞은 오씨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시끄러운 소리에 창밖을 내다본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차가 와서 오씨를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도착하자 마자 숨지고 말았습니다. 오씨가 머물고 있던 목사인 작은 아버지의 집문을 나선지 5분만에 일어난 일었습니다. 청소년 댄싱 파티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입장료 35센트를 강탈하기 위해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으로 미 전역이 들썩거렸습니다. 범인들이 청소년이지만 극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결국 11명 중 3명이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아들을 잃은 오기병 장로가 쓴 편지가 필라델피아 시장에게 전달된 겁니다. 그 안에는 편지와 함께 $500이라는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승화시켜 기독교적 소망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 인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고, 큰 충격과 비탄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살인자들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과 인간성 마비에 대해서도 슬프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인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족은 가족회의를 열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관대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청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희생자 본인과 그의 가족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습니다."
"… 교육적 빈곤이 살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은 이들이 석방된 뒤에 직업 교육 및 사회 적응의 목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기금을 적립하기로 했습니다. … 이것은 죽임을 당한 이와 죽인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며 우리를 기독교적 사랑과 친교 안에 연결되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다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성령으로 우리의 소망을 밝혔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미국 국민들과 특히 우리의 피붙이인 아들을 죽게 한 이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기병(오인호 씨 아버지) 올림.
다시 미국 전체는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신문마다 이 사건을 대문짝만하게 실었습니다. “악을 선으로 갚다”, “아들을 죽인 살인자들을 위해 500불을 기부한 오씨의 부모님들” 등의 제목으로 기사를 다투어 싣기 시작했습니다.
오 장로님의 용서의 편지는 미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1962년 미국 장로 교회에서는 “한국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하여 5000여개의 교회에서 상영해 용서의 능력을 전했습니다. 범인 중 한 명은 훗날 오씨의 가족에게 참회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오인호 기념 코리아 센터’가 건립되어 가난한 아시안들을 돕는 사역을 펼쳐갔습니다. 아들을 살인한 청소년들을 용서한 한 장로님의 사랑이 낳은 놀라운 결과들입니다.
용서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은 참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일단 결정하고 용서의 사랑이 실천되기만 하면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영향력을 낳게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