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오늘 읽은 말씀은 마태복음에 그대로 등장합니다.
이사야 7장의 말씀은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합니다. 요셉이 마리아가 혼인 전에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고 갈등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님에 의해 된 것을 알려주고,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짓게 하고, 이 기적의 사건은 이사야 7장 14절의 말씀이 드디어 성취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천사가 말한 두 이름, 예수와 임마누엘의 뜻을 연결하면 그대로 기쁨 소식, 복음이 됩니다. 천사가 지어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은 하나님께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둘을 합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오셔서 함께 하신다”가 됩니다. 이 두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사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이사야 9장의 말씀은 마태복음 4장에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이곳 저곳을 다니시며 백성들을 만나 사역하시는 장면을 보고, 마태는 이사야의 이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고난과 절망 속에 살던 백성들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천국 복음을 듣고 그 영혼이 살아나고, 예수님의 터치로 각종 질병에서 치유되어 기뻐 뛰는 모습으로 보고, 마치 아침 해가 떠올라 밤의 어둠과 그늘을 몰아내는 장면과 같다는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이 떠오른 겁니다. 사실 마태 자신도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자기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 말씀하셨을 때, 자신의 영혼이 환하게 살아나는 걸 체험한 겁니다. 세리라는 직업이 벌이는 쏠쏠했어도, 자기 동족에게 소외 당하고 욕을 먹어야 하는 아주 험한 일이었습니다. 삭개오 기억하시죠. 예수님을 보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틈을 내주지 않는 바람에, 다 큰 어른이 뽕나무에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 삭개오의 직업이 바로 세리였습니다. 그러니 마태의 마음은 어둠에 짓눌려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한 마디가 자신의 영혼에 들어오는 순간, 그 말씀이 빛이 되어 그동안 쌓였던 어둡고 칙칙하고 마음을 다 몰아내는 걸 경험한 겁니다. 그래서 마태는 바로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친구들을 초대했습니다. 자기 친구들도 그 생명의 빛을 체험하길 간절히 원했던 겁니다. 이런 자기 체험과 주님을 따르는 동안 본 사건들 때문에 마태는 확신을 가지고, 이사야 9장 2절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깊이 묵상하면, 이사야 7장의 임마누엘과 9장의 빛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말씀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계몽주의가 짬뽕이 된 이단, Deism을 퇴치하기 위해 말씀을 collect하던 찰스 제넨스는 이 두 말씀을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겪은 불행한 사건 때문에 더 그랬을 겁니다. 찰스의 동생 중 하나가 자살하고 만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동생이 Deism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찰스는 동생을 자살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어간 것이 Deism이라는 이단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Deism은 인간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걸 부정합니다. 임마누엘을 부정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Deism의 이런 주장을 믿는 자들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감옥, 그것도 출구가 없어서 빠져나갈 수도 없는 감옥에 갇혀 사는 불쌍한 자들이라는 걸 찰스는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인간이 지닌 알량한 능력과 지혜만으로는 인생에서 만나는 어떤 문제도 제대로 완전하게 풀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임마누엘, 하나님의 임재를 부정하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도 아예 없는 겁니다. 그러니 어려움이 닥치면 빠져나갈 출구가 없는 겁니다. 찰스는 자기 동생도 이 엄청난 오류에 빠져 자살했다는 걸 확신한 겁니다. 자기 능력을 넘어서는 큰 문제를 만났는데, Deism이라는 잘못된 신앙 때문에 끝까지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니까 결국 절망하고 생을 포기했다는 걸 안 겁니다.
이런 아픈 경험이 있는 찰스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두 말씀을 선택해서 가사로 사용한 겁니다. 빛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꼭 믿으셔야 합니다. 내 동생과 같은 불행한 죽음이 다시는 없길 바랍니다. 메시아에는 찰스의 이런 절규가 담겨 있는 겁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찰스와 헨델이 살던 18세기 못지 않게, 신앙인들을 유혹합니다. 그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발달한 과학과 기술이 임마누엘의 신앙을 흔들고 있는 겁니다. 최근에 등장한 AI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꿔 놓을지 짐작도 못할 정도입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담아 유발 하라리라는 학자는 최근 [호모 데우스]라는 책을 발표했습니다. 호모 데우스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18세기 보다 신앙을 지키기 훨씬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과학과 기술이 더 발달한 선진국에서 교회와 교인의 수가 드라마틱하게 감소하고 있는 걸 보면 이 위기가 실감됩니다.
이 영적 위기 속에서, 우리 두란노 식구들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말씀에 더 가까이 가고, 하나님 앞에 나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셔서, 우리를 덮고 있는 어둠을 속히 몰아내시는 빛을 체험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쌓고 있는 바벨탑에 눌려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임마누엘의 복음을 전하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