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을 채우다
바울은 드로아를 두번이나 방문했지만 복음을 충분히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후 바울은 드로아를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복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께선 잊지 않으셨습니다. 신비한 방법으로 바울을 드로아로 다시 보내신 겁니다. 바울은 드로아에 도착해서 깜짝 놀랬을 겁니다. 주님께서 자신이 찔끔 전한 복음을 통해 그곳에 교회를 세우신 겁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을 그곳에 보내신 걸까요? 부족한 점들을 채워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가지는 바울 스스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성도들과 교제하는 동안 이 교회에 신앙의 기본 진리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 겁니다. 바울이 잠간 전한 복음 위에 세워졌으니 당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드로아에 오기 몇 달 전 이미 로마서를 쓴 적이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성도들이 로마로 돌아가 세운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교회도 드로아 교회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보내는 편지를 신앙의 기본 진리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니까 드로아 교회의 부족한 점을 채우는데는 바울이 최적의 인물이었던 겁니다. 바울은 로마서의 내용을 가지고 강론했을 겁니다. 강론은 한 주제를 대화와 토론을 통해 전하는 방법입니다. 다음 날 떠나야하는 바울은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기 위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강론을 이어갔습니다. 다음에 다룰 유두고 사건과 성찬식때문에 잠시 중단되었지만, 저녁부터 시작된 강론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기초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세워져가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또 다른 부족한 부분은 유두고 사건을 통해 채워주셨습니다. 이름으로 볼 때 유두고는 청년 노예였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고 지친 몸을 끌고 예배에 참석한 겁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아주 기특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예배가 길어졌습니다. 자정이 되었는데도 바울의 강론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많은 등불을 켜놓은 방의 공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 탁해져갔을 겁니다. 유두고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창쪽으로 가서 그 턱에 걸터앉았습니다. 무교절이 지난 4월말 쯤이니, 창으로 들어오는 봄 밤의 공기는 따뜻하고 신선했을 겁니다. 노동으로 지친 청년에게 봄 밤의 체온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유두고는 깜빡 잠에 들었다가 3층에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떨어진 유두고를 일으켜보니 죽었습니다. 급하게 내려간 바울은 유두고의 몸 위에 엎드려 그를 안았습니다. 기도를 드렸을 겁니다. 기도 후 바울은 외쳤습니다. “그에게 생명이 있다.” 드로아 교회의 성도들은 기적을 체험한 겁니다. 이 기적을 통해 드로아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게 되었을 겁니다. 사건 직후 거행된 성찬식에서 드로아 교인들은 기쁨과 감사와 감동이 넘치는 영혼으로 떡을 떼고 잔을 나누었을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통해 이루신 구원과 그에 따른 복들이 다 진실이라는 것을 더 분명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복음 하나로 세워진 드로아 교회에 필요한 것은 체험 신앙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은 신앙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Knowing about God”의 신앙과 “Knowing God”의 신앙은 아주 다릅니다. 전자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누가 그러는데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라고 합니다”라고 전합니다. 직접 체험이 없으니 이렇게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겁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흔들리기 쉽습니다. 성도들은 “Knowing God”의 체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성도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 성도는 누구 앞에서도 “내가 체험한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라고 당당하게 증거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