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고개를 든 녀석
거실 안으로 스며든 늦가을 햇살이 좋아 큰 유리문 앞을 서성거리며 한 주일의 삶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목회 편지에 사용할만한 소재들을 부지런히 뒤지고 있는데, 거실 한 켠으로 자꾸 눈길이 갔습니다. 그곳엔 작은 화분 안에 담긴 자주빛 국화가 놓여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 깊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부시시하고 창백한 모습이라 볼품도 없지만, 볼 때마다 정이 갑니다.
녀석이 우리 집으로 이주해 온 건 이 주 전 금요일 밤이었습니다. 교회 친교실의 새가족 환영 테이블 위에서 그 소담스런 자태를 마음껏 뽐내며 가을 분위기를 연출해 온 그야말로 ‘꽃’이었는데, 그 금요일 저녁 아내와 함께 발견한 녀석의 모습은 마치 죽음을 코 앞에 둔 병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화려하던 자색은 백태가 낀 듯 변색되었고, 수수함과 고상함이 잘 균형잡힌 얼굴을 단단히 지탱해주던 목도 다 꺾여 있었습니다.
“버려야 되겠죠?” 묻는 아내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습니다. 그후 녀석의 존재는 제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기쁨과 감동으로 가슴 벅찬 금요기도회를 다 마치고 차에 올라보니 녀석이 떡하니 제 차를 타고 있는 겁니다. 반가움과 궁금증이 섞인 표정으로 아내를 돌아보니 “쓰레기통으로 가져가는데 문득 ‘뿌리가 있으니 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합니다.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화분으로부터 가녀린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밤부터 위급한 녀석의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아내와 저의 합동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물을 주고, 볕이 가장 잘드는 곳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가끔씩 유리문 밖으로 외출할 기회를 주어 신선한 바깥 바람을 쏘이게 하고, 그리고 자주 눈을 맞추고는 ‘넌 살아날 수 있어. 우리 사랑이 네게 큰 힘이 되길 바란다.’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처음 이틀은 가망이 없어보였습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고 인내하며 작전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3 일째 되는 날, 새벽 기도를 마치고 거실에 들어선 저는 흥분된 목소리로 아내를 불렀습니다. “녀석이 드디어 고개를 들기 시작했어!”
그후 녀석의 회복은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교회의 테이블을 장식하던 때의 그 왕성한 생명력에는 많이 못미치지만, 푸른 이파리들만 무성한 기존의 화분들 틈에서 ‘꽃’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녀석과 함께 한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행복한 감정을 즐기던 중, 주님께서 남겨놓으신 말씀 한 절이 가슴에 담겨왔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태복음12:20) 죄의 무게에 눌려 점차 다가오는 사망을 소망없이 기다리며 살아가는 인간들을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절망의 수렁에 깊이 빠진 우리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건져내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살리기 위해 창조주가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겁니다.
주님 앞에서 저도 죽음 직전의 화분과 같았습니다. 다행히 주님께서 절 발견하시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를 깨닫게 해주시고, 절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시고, 제 소망없는 마음에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구원의 문이 되시는 주님을 꼭 붙들도록 만들어주신 주님의 ‘이 준 구하기’ 작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문득 이런 질문이 제 영혼을 흔들어댑니다. “저 화분처럼 나는 주님께 기쁨이 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