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커리커처

2018 성탄절 메시지 누가복음 2:1-7

채우미 2018. 12. 25. 00:37



요셉은 황제의 명령을 따라 인구 조사를 위해 살고있던 갈릴리를 떠나 조상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140마일이나 되는 먼 거리를 산달이 가까운 아내 마리아와 함께 가느라 요셉의 이동 속도는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늦었을 겁니다. 그러니 베들레헴에도 남들 보다 늦게 도착했을 겁니다. 당시 베들레헴은 인구가 약 3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 작은 마을에 인구 조사를 위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니 집집마다 숙박객들로 넘쳤을 게 뻔합니다. 요셉은 방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요셉의 마음은 급했습니다. 아내의 해산 시간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급한 중에도 요셉은 좋은 방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지금 태어날 아기가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를 요셉도 마리아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아기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할 자이시라고 알려주었고, 예수라는 아기의 이름까지 가르쳐주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은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브리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을 통해 임신을 하게 될 것과 태어날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니 요셉과 마리아는 그런 귀하신 분을 아무데서나 낳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요셉은 좋은 방을 찾기 위해 베들레헴에 있는 모든 집을 샅샅이 뒤졌을 겁니다.

하지만 사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좋은 방은커녕 빈 방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한 집 주인이 요셉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자기 집 안에 있는 축사, 즉 가축 기르는 공간이라도 원하면 치워주겠다고 합니다.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은 가축이 함께 공존하는 구조였다고 합니다. 기가 막히지만 바로 아기를 낳아야 하는 상황이라 요셉과 마리아는 그 공간이라도 얻어야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가축들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 나신 겁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이런 상황에서 침묵하시며 요셉을 돕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나는 역사적인 사건이잖아요. 그렇다면 왕궁은 아니더라도 제대로된 방 하나 정도는 마련해주셨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사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운영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빈 방 하나 정도 준비하는 거야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아들 예수가 구유에 뉘이는 것을 그냥 보고만 계신 겁니다. 묵상 끝에 이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기도하며 묵상하는 중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첫번째 하나님께선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통해, 인간이 처한 불쌍한 현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구유란 인간이 있어서는 안 되는 장소입니다. 독생자 예수를 100% 인간으로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가축의 먹이를 담는데 사용하는 그런 구유에 보내심으로, 인류 전체가 그들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비참하고 불쌍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창조 때 하나님께선 인간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선 가장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신 후에, 인간을 에덴 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런 후 하나님은 다음 날을 안식일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선 인간을 퍼펙트한 환경인 에덴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존재로 창조하신 겁니다.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자리였던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고는 에덴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히고, 누리던 안식도 잃어버리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해야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고,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고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죄 때문에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 겁니다.

 로마서 3장은 죄로 인해 철저히 망가져버린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찾아서 10절부터 18절까지 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제가 읽어도 되는데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함께 읽으면 좋겠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

의인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그래서 파멸과 고생의 길 위에 있다라는 표현들이 가슴을 아프게 찔러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은혜의 시대가 열리기 전, 온 인류는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철저히 망가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 우리들의 모습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선 구유와 예수, 도저히 연결이 안 되는 그 둘을 묶어두심으로, 죄로 인해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린 인간의 초상을 낱낱히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하신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죄로 망가진 그 모습에서 빨리 벗어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라고 외치며 그들을 흔들어 깨우고 계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구유라는 죄의 구덩이 속에 안주하고 뒹굴고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무지함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너무나 많은 겁니다. 저도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지 10년후, 인생으로 보면 30년을 산 후에야 제가 죄인으로 구유에 묶여있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구유의 예수님이 던져주는 메시지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압니다.

여기 모인 두란노 식구들은 구유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행복한 성도들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구유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만날 때마다, 구유에서 끔찍한 삶을 살다가 구원받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들이 눈을 떠 불쌍하고 처참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구유의 메시지를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구유의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입니다. 구유 속에서 무지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을 구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 모습을 하고 구유 속으로 직접 뛰어드신 겁니다. 이 땅의 다른 종교들은 완전히 구분된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고상한 신을 섬깁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거짓 신들과는 180도 다른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을 갖춘 존재냐, 그것도 아닙니다. 로마서 5장은 예수님께서 구원해주시기 전 우리 인간의 모습을 3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직 연약할 때였다. 시험과 유혹이 오면 저항하지 못하고 그냥 죄를 짓고 마는 존재였다는 뜻입니다.

아직 죄인 되었을 때였다. 그러니 죄가 가득한 독, 통에 빠져 지내고 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였다. 사단과 친구로 지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부하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엔 인간이 다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릴 자격이 전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연약하고 죄인이고 하나님께 원수되었던 자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죄가 가득한 세상, 즉 구유 속으로 직접 찾아오신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럽고 추한 자리에 찾아오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존재에 스며들어 사망의 냄새를 풍기는 죄 전부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오르셔서, 우리 대신 죽임을 당하심으로, 우리 존재를 의와 생명으로 채워주신 겁니다. 구유에 오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주님을 믿는 모든 자를 구유에서 건져내 천국 백성으로 만들어주신 겁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두란노 식구 모두가 하나님의 이토록 무한한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처럼 구유 안으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구유에 묶인 삶이 아니라 이제 구원받아 자유로운 몸으로 들어가, 죄와 사망의 그늘에 묶여 살아가는 자들에게 우리처럼 벗어날 수 있는 길, 즉 복음을 전해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울지마 톤즈라는 다큐 영상을 보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남수단 톤즈라는 지역에 가서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지내며 복음을 전하다 암에 걸려 2010년 소천한 이태석 신부의 삶을 주제로 한 다큐 영상입니다. 수단 사람들 틈에서 그들과 가족처럼 지내고 그들의 육신적인 아픔을 고쳐주고 학생들에게는 음악을 가르쳐주고 그러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자신을 몽땅 드린 신부님의 삶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제 8년이 지났으니 잊고 지냈는데, 한 수단 청년을 다룬 기사 때문에 다시 그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격려와 도움으로 의사가 되기 위해 2009년 한국에 와서 언어를 배우고 의대에 들어가 의사고시에 합격하기까지 9년의 시간을 견뎌낸 토마스라는 청년을 인터뷰한 기사였습니다. 기사 중 가장 눈에 띈 부분은 의사가 되면 수단으로 돌아가 이태석 정신으로 살 겁니다.”라는 다짐이었습니다. 이태석 정신이란 단어가 가슴을 파고 든 겁니다. 이태석 정신은 바로 예수님의 정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묶여 있는 구유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 주님의 정신을 이태석 신부가 본받은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과 위로가 필요한 수단에 직접 들어가 그들과 함께 뒹굴며 복음을 전했던 겁니다. 이제 청년 토마스도 그 뒤를 따르겠다고 결단한 겁니다.

요한복음 17장 마지막 기도 중에 주님은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들을 세상에 보냅니다. 저희들이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켜주세요.” 주님의 기도는 남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을 위한 기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두란노 식구들 모두가 구유와 같은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대는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